제141회 억지로의 축복
2018년 8월 19일 설교

홍성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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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마가복음 15장 21절
“마침 알렉산더와 루포의 아버지인 구레네 사람 시몬이 시골로부터 와서 지나가는데 그들이 그를 억지로 같이 가게 하여 예수의 십자가를 지우고”

 

할렐루야! 하나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억지로의 축복” 無理やりの祝福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 성경 말씀에 보면 당시 대제사장과 그 일당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히게 하기 위하여 총독 빌라도 앞에까지 끌고 갑니다. 이미 여러 차례 채찍질을 당한 예수님은 온몸이 피범벅입니다. 로마 군인들은 예수님의 머리에 가시관을 씌우고 침을 뱉으며 모욕을 합니다.

이제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시고 골고다 언덕을 향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온몸이 피에 젖고 기진맥진한 상태였습니다. 그 골고다로 향하는 길은 좁은 오르막길인데 구전에 의하면 너무나 힘이 들어서 몇 번이고 넘어지셨다고 합니다.

당시 이를 지휘하고 있었던 로마군인들이 보니까 아무래도 안 되겠어요. 시간은 지금 지체하는데 예수님을 보니까 도저히 제대로 못 걸을 것 같아요. 그런데 마침 옆에 누가 서 있길래, 야, 너, 빨리 일루 와서 이 십자가를 대신 져. 그랬을 것입니다. 거기 서 있던 사람이 누구냐 하면 바로 오늘의 주인공 구레네 사람 시몬. 이른바 구레네 시몬이라 불리는 사람입니다.

이 십자가라고 하는 것.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 구주의 십자가, 이러면서 대단히 은혜로운 것처럼 여겨지실지는 모르지만, 사실 이 십자가 자체만을 본다면 이는 쉽게 말해서 사형틀입니다. 무슨 단두대 같은 거라고 생각해보십시오. 생각만해도 얼마나 흉물스럽습니까. 그런 건 손으로 만지는 건 고사하고 근처에도 가기가 꺼려지는 물건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건 무게가 무겁고 가볍고 한 문제만이 아닙니다. 만약에 누가 나더러, 이제 저기 있는 저 사람을 목매달아서 사형을 시키려고 하는데 그 끄나풀을 들고 가라고 해보세요. 그게 아무리 가볍다고 해도 기분이 좋겠습니까.

십자가도 똑같이 그런 사형기구입니다. 신명기 21장 23절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신명기 21장 23절
“그 시체를 나무 위에 밤새도록 두지 말고 그 날에 장사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시는 땅을 더럽히지 말라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음이니라”

その死体を次の日まで木に残しておいてはならない。その日のうちに必ず埋葬しなければならない。木にかけられた者は神にのろわれた者だからである。あなたの神、主が 相続地としてあなたに与えようとしておられる土地を汚してはならない。

즉, 나무에 달린 자, 사형을 당한 자는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받았다는 징표인 것이지요. 이 얼마나 끔찍한 일입니까.

더구나 지금 이 십자가는 나무로 되어 있고, 그리고 사람을 못 박아서 높은 곳에 매달아야 하기 때문에 그 무게를 지탱하기 위해서는 대단히 무거웠을 것입니다.

어디 그 뿐인가요. 만약 사람이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도구라면 쓰기 편하고 만지기도 좋게 매끌매끌하게 만들어놓기도 했겠지만, 십자가라고 하는 사형도구, 이제 그 형틀에 매달리는 사람은 다시는 살아서 내려오지 못합니다. 그런 사람들을 위해서 매끌매끌하게 만들어놓을 이유가 없습니다. 그냥 통나무를 잘라서 만들었을 테니, 그 겉표면은 얼마나 까칠까칠했을까요.

그것도 모자라서 거기까지 온몸이 피에 젖은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고 오셨기 때문에 십자가 여기저기에 피가 덕지덕지 묻어 있었을 것입니다.

누구는 또 이렇게 말합니다. 사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지 않았다. 십자가는 다른 식으로 운반되고 예수님은 그냥 걸어가기만 했다……이런 말씀을 혹시 들어보신 적이 있으신지 모르겠습니다.


이런 말씀을 들으면 어떤 분들은 어? 정말 그런가? 신기하네? 왜 다른 사람들은 나한테 그런 말을 안 해줬지? 라고 생각하실지 모릅니다. 사실 언뜻 생각하면 그렇게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여러분께서는 이 말을 들으시면 어떠십니까. 자칫 잘못하면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 이유를 말씀 드립니다.

마태복음 27장 31절을 봅니다.
“희롱을 다 한 후 홍포를 벗기고 도로 그의 옷을 입혀 십자가에 못 박으려고 끌고 나가니라”

こうしてイエスをからかってから、マントを脱がせて元の衣を着せ、十字架につけるために連れ出した。

다음은 마가복음 15장 20절입니다.
“희롱을 다 한 후 자색 옷을 벗기고 도로 그의 옷을 입히고 십자가에 못 박으려고 끌고 나가니라”

彼らはイエスをからかってから、紫の衣を脱がせて、元の衣を着せた。それから、イエスを十字架につけるために連れ出した。

그리고 누가복음 23장을 보면 예수님을 끌고 갔다는 기록은 있지만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짊어지셨다는 기록이 없습니다.

그래서 어? 그럼 어쩌면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지 않았을 수도 있네? 라고 생각하실지 모르겠습니다만, 요한복음을 봅니다. 요한복음 19장 17절입니다.

요한복음 19장 17절
“그들이 예수를 맡으매 예수께서 자기의 십자가를 지시고 해골(히브리 말로 골고다)이라 하는 곳에 나가시니”

イエスは自分で十字架を負って、「どくろの場所」と呼ばれるところに出て行かれた。そこは、ヘブル語ではゴルゴタと呼ばれている。


분명히 이렇게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친히 그 거칠고 무거운 십자가를 지고 올라가셨던 것입니다. 금식도 좋고 기도도 좋고 봉사도 좋습니다만, 우선 성경말씀부터 제대로 알아야 합니다. 성경 말씀이 우리 안에 있어야 넘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그 예수님이 지신 십자가, 이는 보통 사람이라면 근처에도 가기 싫었을 정도였겠지요.

그런데 갑자기 길 옆에 서 있는 사람한테 그 십자가를 지라는 것이에요. 그 십자가, 무거운 사형틀, 조금 지고 가기만 해도 까칠까칠한 나무 때문에 온몸의 여기저기가 긁힐 것만 같은 십자가, 여기저기에 피가 덕지덕지 묻어 있는 십자가를 지고 가라는 것입니다.

만약에 정말 믿음이 좋은 여러분 같았더라면 물론 할렐루야! 하고 십자가를 지셨을지는 모르지만,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예수님과 함께 몇 년을 함께 했던 제자들은 자기 목숨 하나 살려보려고 모두 달아났습니다.

이른바 수제자라고 하는 베드로도, 너, 예수님과 함께 있지 않았냐고 누군가가 물었을 때 세 번이나 모른다고 했습니다. 어디 그냥 모른다고 했나요?

마가복음 14장 71절
“그러나 베드로가 저주하며 맹세하되 나는 너희가 말하는 이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 하니”

するとペテロは、噓ならのろわれてもよいと誓い始め、「私は、あなたがたが話しているその人を知らない」と言った。

베드로조차도 너무나 두려워서, 정말 저주하고 맹세까지 해가면서 예수님을 부인했었습니다. 그런데 그 때까지 예수님을 전혀 모르는 사람한테 그런 십자가를 매고 가라면 누가 좋아하겠습니까.


마가복음 15장 21절 후반부를 보면 “억지로 같이 가게 하여 예수의 십자가를 지우고 (イエスの十字架を無理やり背負わせた。)”라고 되어 있습니다.

만약에 “억지로 지게 했다”는 표현이 마가복음에만 있다면, 이 장면을 묘사한 마가의 주관적이고 독단적인 기록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요. 사실 이 구레네 시몬은 억지로 간 게 아닌데, 그냥 마가가 보기에 억지로 가는 것처럼 보였을 뿐이다……라고 할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마태복음을 보시겠습니다. 마태복음 27장 32절입니다.

마태복음 27장 32절
“나가다가 시몬이란 구레네 사람을 만나매 그에게 예수의 십자가를 억지로 지워 가게 하였더라”

兵士たちが出て行くと、シモンという名のクレネ人に出会った。彼らはこの人に、イエスの十字架を無理やり背負わせた。

예수님의 열두 사도 중 한 사람인 마태는 그의 전직이 세리였습니다. 세리라고 해서 단순히 요즘 세무 공무원이 아닙니다. 말하자면 공인된 고리대금업자라고 할 수 있겠지요. 당시 이스라엘을 지배하고 있었던 로마의 앞잡이가 되어서 자신들과 동족인 이스라엘 민족들의 피를 빨아먹고 있었던, 대단히 미움을 받는 사람들이 바로 세리였는데, 마태도 바로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마태가 예수님의 부름을 받고 사도가 된 것이지요. 이 마태복음을 보면 아무래도 돈을 다루던 직업에 오랫동안 종사해서 그런지 다른 복음서에 비해 묘사가 대단히 꼼꼼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마태도 분명히 <억지로 지워가게 하였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구레네 시몬에 대한 기록은 사복음서,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 그리고 요한복음 중에서 요한복음을 제외한 마태, 마가, 누가복음에 등장하는데, 이미 우리가 살펴본 것처럼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서는 <억지로 지었다>는 표현이 명확하게 등장합니다.

자, 그렇다면 누가복음에는 어떨까요. 누가라는 사람은 열 두 사도에 들지는 못했지만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후에는 바울과 선교여행도 함께 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을 기록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만, 그의 전직은 의사였다고 합니다. 그러니 역시 그도 지금 식으로 하자면 이과적인 관찰력으로 세심하게 묘사했을 것입니다.

그런 전직 의사였던 누가가 이 장면을 어떻게 묘사했는지 한 번 살펴보겠습니다.

누가복음 23장 26절
“그들이 예수를 끌고 갈 때에 시몬이라는 구레네 사람이 시골에서 오는 것을 붙들어 그에게 십자가를 지워 예수를 따르게 하더라”

彼らはイエスを引いて行く途中、田舎から出て来たシモンというクレネ人を捕まえ、この人に十字架を負わせてイエスの後(うしろ)から運ばせた。

누가는 그들이 구레네 시몬을 “붙들어서 그에게 십자가를” 지웠다고 (捕まえ、この人に十字架を負わせて) 기록합니다. 붙들어서 하게 했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나는 싫다고 강하게 거부하면서 어떻게 해서든지 벗어나려 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상대는 로마 군인입니다. 군인이 구레네 시몬을 붙잡아서 강제로 십자가를 지우게 했다고 기록한 것입니다.

이렇게 본다면 우리는 적어도 두 가지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첫째로 구레네 시몬이 십자가를 지게 된 일은 마태, 마가, 누가복음에 모두 기록될 정도로 대단히 인상 깊은 사건이었다. 그리고 둘째는, 이는 틀림없이 구레네 시몬은 자신이 원하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강제로 억지로 십자가를 지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처럼 억지로 예수님의 십자가를 지게 된 구레네 시몬. 하지만 이로 인해서 그의 자손들이 축복을 받았다는 말씀을 들어보신 적이 있으실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근거가 있는 것인지, 또한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인지를 오늘 한 번 여러분과 살펴보고자 합니다.

먼저 오늘 말씀을 다시 한 번 보겠습니다.

마가복음 15장 21절
“마침 알렉산더와 루포의 아버지인 구레네 사람 시몬이 시골로부터 와서 지나가는데 그들이 그를 억지로 같이 가게 하여 예수의 십자가를 지우고”

兵士たちは、通りかかったクレネ人シモンという人に、イエスの十字架を無理やり背負わせた。彼はアレクサンドロとルフォスの父で、田舎から来ていた。

여기에 등장하는 <루포>에 대해서 작은 글씨로 적혀 있는 성경 주석에 보면 로마서 16장 13절……이렇게 적혀있고, 그 다음에 괄호를 해서 이렇게 물음표가 붙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두 구절 간에 연관성이 있는지 없는지 확실하지 않다는 것이겠지요.

자, 그럼 로마서 16장 13절을 찾아봐야겠지요? 이 부분은 바울이 로마에 보내는 편지를 맺으면서 안부인사를 적은 장면입니다만, 그 과정에서 로마서 16장 13절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습니다.

로마서 16장 13절
“주 안에서 택하심을 입은 루포와 그의 어머니에게 문안하라 그의 어머니는 곧 내 어머니니라”

主にあって選ばれた人ルフォスによろしく。また彼と私の母によろしく。

(口語訳)主にあって選ばれたルポスと、彼の母とに、よろしく。彼の母は、 わたしの母でもある。
(新共同訳)主に結ばれている選ばれた者ルフォス,およびその母によろしく.彼女はわたしにとっても母なのです.


성경에는 수많은 사람들의 이름이 등장합니다만, <루포>라는 이름은 신구약을 통틀어서 마가복음 15장 21절과 로마서 16장 13절 단 두 군데만 등장합니다.

로마서를 보면 바울이 루포를 가리켜서, 그는 주 안에서 택하심을 입었다(主にあって選ばれた人ルフォス)는 말까지 하고, 그의 어머니에 대해서는 곧 자신의 어머니나 마찬가지라고 할 정도라고 하면서 안부를 전해달라고 인사를 하고 있습니다. 이 글만을 보더라도 루포만이 아니라 그의 가정과 사도 바울은 대단히 돈독한 사이였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겠습니다만, 그 뿐만이 아니라 이렇게 로마서에 적어서 보낼 정도였다면, 이를 받은 쪽에서도 루포가 누구이고 그의 어머니는 누구인지에 대해서는 모두가 이미 다 알고 있을 정도로 유명한 사람이었을 것이다 라고 하는 짐작을 할 수 있습니다.

이를 뒷받침해주는 구절이 바로 오늘 말씀 마가복음 15장 21절입니다.

보통 성경에 보면 누군가를 소개할 때 어떻게 하는지 혹시 기억 하십니까?

예레미야 1장 1절을 봅니다.
“베냐민 땅 아나돗의 제사장들 중 힐기야의 아들 예레미야의 말이라”

ベニヤミンの地、アナトテにいた祭司の一人、ヒルキヤの子エレミヤのことば。

요엘1장 1절
“브두엘의 아들 요엘에게 임한 여호와의 말씀이라”

ペトエルの子ヨエルにあった主のことば。

이사야 1:1
“유다 왕 웃시야와 요담과 아하스와 히스기야 시대에 아모스의 아들 이사야가 유다와 예루살렘에 관하여 본 계시라”

アモツの子イザヤの幻。これは彼がユダとエルサレムについて、ユダの王ウジヤ、ヨタム、アハズ、ヒゼキヤの時代に見たものである。


이처럼 아버지 누구누구의 아들 누구누구……라고 소개를 하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에 보면, 구레네 사람 시몬의 아들 알렉산더와 루포……가 아니라, 아들이 먼저 와 있어요. 알렉산더와 루포의 아버지 구레네 사람 시몬……이라는 것입니다. 이처럼 기록이 되는 일은 단 한 가지 경우입니다. 그것은 바로, 아들이 아버지보다 유명한 경우입니다.

그러니까 오늘 말씀에서 아들 이름을 먼저 언급했다는 것은, 마가에 의해 이 복음서가 기록될 무렵, 그들에게 알렉산더와 루포라는 이름은, 적어도 이 글을 읽는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그의 아버지 <시몬>보다 너무나도 잘 알려진 이름이었을 것이라는 점입니다. 그러니까 쉽게 말해서, 이런 식이죠.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알렉산더와 루포의 아버지 이름은 시몬이라고 하는데,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고 가실 때 …… 뭐 이런 식인 것입니다.

그리고 또 흥미로운 점은, 신학자들에 의하면 마가복음의 수신인은 이스라엘이 아니라 이방 지역의 기독교인을 위해 적혔다고 하는데, 이 점에 있어서는 로마서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즉, 마가복음과 로마서 모두가 이미 수신인들이 <루포>에 대해서 잘 알고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해서 기록되었다는 점, 그리고 마가복음과 로마서 모두가 이방 지역의 기독교인을 위해서 기록되었다는 공통점으로 미루어볼 때, 믿음의 형제들 중에 유명인사인 루포, 사도 바울이 그를 가리켜서 주의 택하심을 입었다고 말하고, 그의 어머니는 내 어머니나 마찬가지로까지 할 만큼 친근감을 표시한 가정은,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신 짊어진 구레네 시몬의 가정이었을 것이라고 결론을 내리기에 충분한 근거가 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자, 알렉산더와 루포의 아버지(アレクサンドロとルフォスの父) 구레네 시몬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짊어졌습니다. 이는 결코 그가 원해서 지었던 것이 아닙니다.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 기록된 것처럼, 지기 싫은데도 억지로 지었습니다. 누가복음의 기록대로라면 도망치고 싶었을지도 모르나 붙잡히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지었습니다.


인간적인 눈으로 볼 때에는 저주스럽고 무겁고 지저분한 나무통나무, 끔찍한 사형도구이지만, 그것은 영적으로 본다면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예수님께서 지시는 십자가, 그 십자가에 묻은 피는 우리를 죄에서 씻기시는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님의 보혈이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우리 성도 여러분, 억지로 하는 일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누구는 생로병사. 태어나고, 늙고 병 들고 죽는 것을 모두 고통이라고 합니다.

이 네 가지를 본다면 사실 모두가 억지로입니다. 내가 좋아서, 기쁜 마음으로 늙는 사람, 기쁜 마음으로 병에 걸리는 사람, 기쁜 마음으로 죽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이는 다 내가 원하지 않는데도 늙고, 내가 원하지 않는데도 병에 걸리고, 내가 원하지 않는데도 죽어가는 것입니다.

태어나는 것은 어떻습니까. 어디 한 번 이 세상에 태어나볼까? 해서 태어나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이는 모두가 다 강제로, 억지로 태어나서 억지로 늙고 억지로 병들고 억지로 죽어간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이 고통인가요? 적어도 주님을 믿는 우리는 이를 고통으로 받아들이면 안 됩니다. 그럼 무엇으로 받아들여야 합니까. 그렇습니다. 바로 감사입니다.

내가 태어난 것도 감사, 내가 늙는 것도 감사, 내가 병에 걸리는 것도 감사, 내가 죽는 것도 감사입니다.

이 세상에 생명을 주시고 주님께서 함께 해주신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합니까. 그리고 늙는 것이 고통이에요? 늙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바로 살아있기 때문 아니겠습니까. 나이 마흔, 쉰이 아니라 열 살, 스무 살도 못 넘기고 이 세상을 떠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죽으면 더 이상 나이를 먹지도 않습니다. 그런데 살아서 나이 50, 60, 70을 넘길 수 있다는 것은 이는 엄청난 축복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잊어서는 안 되겠지요.


우리가 질병을 앓는 것도 믿음 안에서는 감사할 수 있습니다. 왜 감사할 수 있습니까. 그것은 바로 주님께서 치료해주실 것이기 때문에 감사한 것입니다. 이로 말미암아 주님의 영광을 나타내실 것이기 때문에 감사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죽음도 감사할 수 있을까요?

로마서 14장 8절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

私たちは、生きるとすれば主のために生き、死ぬとすれば主のために死にます。ですから、生きるにしても、死ぬにしても、私たちは主のものです。

빌립보서 1장 20절~21절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지금도 전과 같이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려 하나니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

私の願いは、どんな場合にも恥じることなく、今もいつものように大胆に語り、生きるにしても死ぬにしても、私の身によってキリストがあがめられることです。
私にとって生きることはキリスト、死ぬことは益です。

빌립보서 3장 13절~14절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

兄弟たち。私は、自分がすでに捕らえたなどと考えてはいません。ただ一つのこと、すなわち、うしろのものを忘れ、前のものに向かって身を伸ばし、
キリスト・イエスにあって神が上に召してくださるという、その賞をいただくために、目標を目指して走っているのです。

우리가 믿음의 푯대를 향해서 달려가고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게 되다면 이 얼마나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 기쁨으로 충만한 삶이 되겠습니까. 태어나고 나이 들고, 병에 걸리고 죽는 것이 우리 마음대로 되는 것이 아닌 억지로 되는 것이지만, 이는 믿음 안에서 이 모두가 감사인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잊어서는 안 되겠지요. 예수님께서는 억지로 하신 것이 없으셨습니까. 아니요. 있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었습니까. 그렇습니다. 바로 십자가입니다. 예수님께서도 하나님께 기도 드리시기를

마태복음 26장 39절
“조금 나아가사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려 기도하여 이르시되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

それからイエスは少し進んで行って、ひれ伏して祈られた。「わが父よ、できることなら、この杯をわたしから過ぎ去らせてください。しかし、わたしが望むようにではなく、あなたが望まれるままに、なさってください。」

주님께서는 하나님께 순종하는 마음으로 십자가에 달리시게 됩니다. 그 결과 어떻게 되었습니까.

로마서 5장 8절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しかし、私たちがまだ罪人であったとき、キリストが私たちのために死なれたことによって、神は私たちに対するご自分の愛を明らかにしておられます。

예수님의 십자가 순종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확실하게 증거해주셨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그렇습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십대들은 종종 자신의 미래에 대해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나는 내가 원하는 일을 하면서 살아가고 싶어요”

그러나 이 말을 듣는 어른들은 어떻습니까. 어쩌면 누구는 철없는 소리 한다면서 웃을지도 모릅니다. 사실 그렇죠. 우리가 이 세상을 살다 보면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한다기 보다는, 어쩔 수 없이 억지로 해야 하는 일을 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알고 보면 처음에는 내가 좋아서 시작한 일이지만, 그렇다고 노력이나 희생이 안 따르나요? 아닙니다. 항상 즐겁기만 한 일은 없습니다. 부단한 노력과 희생이 있어야 합니다. 이렇게 본다면 어쩌면 우리 삶의 대부분이 억지로 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좌절하거나 낙심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십자가인지도 모릅니다.

누구는 십자가에 대해서 무슨 고통이나 고난이라고 오해하시는 분이 계십니다. 누구는 그래요. 아~ 자기한테는 자기 자식들이 십자가래요. 너무나 속을 썩이는데 정말로 속이 상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십자가는 고통이나 고난을 주는 것이 아닙니다. 속을 썩이는 게 십자가가 아닙니다. 고통과 고난의 십자가는 이미 예수님께서 2000년 전에 우리를 위해 지셨습니다. 우리에게 있어서 십자가는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내는 것이 십자기인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 삶 속에서 내가 억지로 해야 할 일들이 있어요. 아무리 기도를 해도 믿음 안에서 생각을 해도 피할 수가 없어요. 하지만 정말 하기 싫어요. 바로 그 때 구레네 시몬을 떠올리시기 바랍니다. 어쩌면 이를 감사함으로 감당함으로 인해서 주님께 영광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보시기 바랍니다.

어떤 분은 또 이렇게 생각할지도 모르겠어요. 내가 축복 받지 않고 내 자식들만 축복 받으면 뭘 해. 혹시 그런 생각 안 해보셨나요? ㅎㅎ 저는 해봤습니다. 하지만 생각해보세요. 아버지가 축복 받지 못했는데 어떻게 자식들이 믿음을 가질 수 있었겠습니까. 예수님의 십자가를 짊어짐으로 말미암아 아버지 시몬은 넘치는 축복을 받았을 것이요, 이를 본 아들들 알렉산더와 루포가 큰 믿음을 가질 수 있었을 것입니다.

여러분, 억지로 감당해야 할 일들이 있습니까? 감사합시다. 주님께서 함께 하십니다. 주님께서 역사하십니다. 주님께서 힘을 주십니다.

주님께서 주시는 그 일을 감사함으로 감당함으로 말미암아 주님의 사랑을 나타내고, 주님께 큰 영광을 돌리고 주님으로부터 넘치는 축복을 모두 받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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