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78회 새로운 시대의 시작
2019년 4월 28일 설교

홍성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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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25장 40절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

 

할렐루야! 하나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새로운 시대의 시작” 新しい時代の始まり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주일학교 선생님들이 간혹 어려움을 겪는 이유 중 하나가 갑작스러운 질문을 당할 때라고 합니다. 아담과 하와는 어떻게 생겼는지, 아담과 하와의 자녀는 아들 밖에 기록되지 않았는데 어떻게 아이들이 늘어났는지, 하나님은 여러 가지 그림처럼 수염이 있는지 어떤지…… 이런 질문들을 진지하게 물어오면 가끔 당황스럽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런 질문은 어떻습니까. 구약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이방인 민족 땅을 점령하라고 하시는 경우가 있는데, 그 때 보면 좀 너무 심하다 싶을 정도로 명령을 하시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단순히 점령하라는 것이 아니라 모두를 죽이라고 명령하실 때가 있습니다.

신명기 20장 16절~17절
“16.오직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시는 이 민족들의 성읍에서는 호흡 있는 자를 하나도 살리지 말지니
17.곧 헷 족속과 아모리 족속과 가나안 족속과 브리스 족속과 히위 족속과 여부스 족속을 네가 진멸하되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명령하신 대로 하라”

あなたの神、主が相続地として与えようとしておられる次の民の町々では、息のある者を一人も生かしておいてはならない。
すなわち、ヒッタイト人、アモリ人、カナン人、ペリジ人、ヒビ人、エブス人は、あなたの神、主が命じられたとおり必ず聖絶しなければならない。


이제 이스라엘 민족이 가나안 땅을 점령할 것인데, 그 때에는 호흡 있는 자를 하나도 살리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호흡 있는 자가 무엇입니까. 살아 있는 사람들, 즉 전쟁을 할 수 있는 성인 남성만이 아니라 그야말로 남녀노소, 여자와 어린 아이들까지도 모두 죽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구절은 여기만이 아닙니다.

민수기 21장에 보면 광야에서 바산 왕 옥을 멸하는 기록이 있는데 이는 다음과 같습니다.

민수기 21장 33절~35절
33.그들이 돌이켜 바산 길로 올라가매 바산 왕 옥이 그의 백성을 다 거느리고 나와서 그들을 맞아 에드레이에서 싸우려 하는지라
34.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그를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그와 그의 백성과 그의 땅을 네 손에 넘겼나니 너는 헤스본에 거주하던 아모리인의 왕 시혼에게 행한 것 같이 그에게도 행할지니라
35.이에 그와 그의 아들들과 그의 백성을 다 쳐서 한 사람도 남기지 아니하고 그의 땅을 점령하였더라

さらに彼らが向きを変えてバシャンへの道を上って行くと、バシャンの王オグが、エデレイで戦うために、そのすべての兵とともに彼らの方に出て来た。
主はモーセに言われた。「彼を恐れてはならない。わたしは彼とそのすべての兵とその地をあなたの手に与えた。あなたがヘシュボンに住んでいたアモリ人の王シホンに行ったように、彼にも行え。」
そこで彼らは、彼とその子たちとそのすべての兵を討ち、一人の生存者も残さなかった。こうして彼らはその地を占領した。


그리고 여리고를 점령할 때의 모습은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여호수아 6장 21절
“그 성 안에 있는 모든 것을 온전히 바치되 남녀 노소와 소와 양과 나귀를 칼날로 멸하니라”

町のものをすべて、男も女も若者も年寄りも、また牛、羊、ろばも剣(つるぎ)の刃(は)で聖絶した。

가나안 점령 때만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사울에게 아말렉 족속 토벌을 명하시는데 그 명령이 다음과 같습니다.

사무엘상 15장 3절
“지금 가서 아말렉을 쳐서 그들의 모든 소유를 남기지 말고 진멸하되 남녀와 소아와 젖 먹는 아이와 우양과 낙타와 나귀를 죽이라 하셨나이다 하니”

今、行ってアマレクを討ち、そのすべてのものを聖絶しなさい。容赦してはならない。男も女も、幼子も乳飲み子も、牛も羊も、らくだもろばも殺しなさい。』」

아니, 어른들은 그렇다고 쳐요. 그런데 젖 먹는 아이까지 죽이라는 것은 너무하지 않느냐는 것이지요. 그러면서 누구는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라고 하는데, 그렇다면 그들은 사랑하지 않으셨느냐. 젖 먹는 아이까지 죽이라고 하는 게 무슨 사랑의 하나님이냐. 그 사람들도 역시 하나님이 만드신 피조물이 아니지 않느냐.

이렇게 하는 말을 들어보신 적이 있으신지 모르겠습니다. 누가 여러분께 이렇게 묻는다면, 여러분께서는 어떻게 대답하시겠습니까. 어? 정말 그러네?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 아닌가 보네? 하고 마실 건가요?


여러분, 하나님이 피조물을 죽이라고 하신 명령이 너무하다고 느껴지시나요? 사실 성경에는 그보다도 더욱 잔인한 살인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이는 바로 하나님의 아들을 죽인 기록입니다. 그것도 가장 잔인한 처형방법으로 살해한 기록인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님의 목숨에 대한 가치를 생각해볼 때, 과연 인간의 목숨 몇 명 정도면 비슷할 수가 있을까요?

사실 이게 비교가 되나요? 가나안이나 이방민족 만이 아닙니다. 그리고 지금 살아 있는 사람만이 아니라, 역사상 존재했던 모든 인류의 목숨들을 다 합친다 하더라도 어떻게 예수님 목숨에 비할 수가 있겠습니까.

잠시 화제를 돌려보겠습니다.

예전에 어떤 신학교 교수님이 적은 글을 읽어본 적이 있습니다. 신학교에서 자신의 수업 첫 시간에는 반드시 하는 일이 있다는 거예요. 그게 뭐냐 하면, 일단 가지고 있는 성경을 꺼내라고 시킨대요. 그러면 신학생들이니까 대부분 성경을 가지고 있겠지요. 성경책에서 구약과 신약 사이를 보면 그 사이를 가르고 있는 종이가 있는데, 성경에서 구약과 신약은 차이가 있는 것이 아니라 똑 같은 것이다. 그러면서 이 종이를 찢으라고 시킨다는 것입니다.

여러분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저는 당시 이 말씀을 듣고 음…그냥 뭐 그런가 보다 했습니다만, 지금 생각해보면 조금 동의할 수 없는 부분이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히브리서 10장 1절을 봅니다.

히브리서 10장 1절
“율법은 장차 올 좋은 일의 그림자일 뿐이요 참 형상이 아니므로 해마다 늘 드리는 같은 제사로는 나아오는 자들을 언제나 온전하게 할 수 없느니라”

律法には来たるべき良きものの影はあっても、その実物はありません。ですから律法 は、年ごとに絶えず献げられる同じいけにえによって神に近づく人々を、完全にすることができません。

이 구절을 들어 흔히 하는 말이 신약이 실체라고 하면 구약은 그림자라고 합니다. 그림자와 실체는 사실 불가분의 관계라고 할 수가 있지요. 그래서 실체와 그림자, 즉 구약과 신약은 차이가 없다, 똑 같은 것이다……이와 같은 주장도 나름 일리가 있다고 여겨집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구약과 신약이 동일하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예를 들어서 기독교와 천주교는 물론이지만, 유대교, 이슬람교 같은 것을 보면 그 뿌리는 같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다만 특히 유대교나 이슬람교 같은 경우는 신약을 믿지 않지요. 다시 말해서 예수님은 삼위일체 하나님이시며, 성부 하나님의 독생자 되신 성자 하나님이시고, 우리의 구주시고,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해결하시기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로 하여금 죄 사함을 얻게 하셨다는 것을 믿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잘못이 시작한 것입니다.

지난 4월 21일 부활절에 스리랑카에서 동시다발 테러가 발생했습니다. 이로 인해서 일본인 여성을 포함한 253명이 사망하고 약 500명이 부상을 입었다는 슬픈 소식이 전해져 왔습니다. 이후 조사에 의하면 그 배후에는 이슬람 과격단체가 있다고 합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는다는 것은 여전히 구약이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때문에 하나님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 이방인에 대한 잔혹한 학살을 정당화시키는 사람들도 여전히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얼마나 큰 비극을 낳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예수님을 믿습니다. 물론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죄 때문에 죽으셨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누구에 의해 죽으셨습니까. 다시 말해서 직접적으로 누가 예수님을 죽이셨느냐 하는 것입니다.

물론 이와 같은 질문을 보면 <내가 죽였다>라고 고백하도록 교육을 시키는 경우도 있겠습니다만, 방금 말씀 드린 것처럼 우리 죄 때문에 예수님께서 죽으신 것은 맞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직접적으로 우리가 2천년 전에 예수님을 십자가에 매달게 한 것은 아니잖아요?

그렇다면 다시 묻겠습니다. 당시 예수님을 죽인 것은 누구입니까. 다시 말해서 2천년 전에 예수님을 죽인 진범은 누구냐 하는 것이지요.

예수님을 판 가룟 유다인가요? 바리새인인가요? 제사장인가요? 본디오 빌라도인가요? 로마 군인인가요?

성경은 이 점에 대해서 분명히 기록하고 있습니다.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 예수님께서는 어떻게 기도하셨습니까.

누가복음 22장 42절
“이르시되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거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시니”

「父よ、みこころなら、この杯をわたしから取り去ってください。しかし、わたしの願いではなく、みこころがなりますように。」

예수님께서는 아셨습니다. 자신을 십자가에 달리게 하는 분은 바리새인도 아니요, 유다도 아니요, 로마 군인도 아닌, 바로 하나님 아버지라고 하는 사실을 알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것도 가장 처참하게 십자가에 달리게 하신다는 것을 너무나도 잘 알고 계셨습니다. 그러니 얼마나 마음이 괴로우셨겠습니까.

누가복음 22장 44절
“예수께서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 같이 되더라”

イエスは苦しみもだえて、いよいよ切に祈られた。汗が血のしずくのように地に落ちた。〕

얼마나 괴로우셨으면 기도를 하는데 땀이 핏방울처럼 되었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앞서 말씀 드린 바와 같이 예수님의 목숨은 역사상 전 인류의 목숨이라 하더라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존귀합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 하나님에 의한 예수님의 십자가 살해사건이야말로 지금까지 그 어떤 학살보다도 더욱 처참한 대학살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예수님은 왜 죽으셔야 했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왜 예수님을 죽이셔야 했습니까.

이유는 오직 하나 뿐입니다. 나 하나 살려보려고 그러신 것입니다. 이런 죄 많고 부족한 나 하나 살려보시려고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그렇게 무참하게 죽도록 하신 것인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누가복음 15장 4절~6절
“4.너희 중에 어떤 사람이 양 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의 하나를 잃으면 아흔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그 잃은 것을 찾아내기까지 찾아다니지 아니하겠느냐
5.또 찾아낸즉 즐거워 어깨에 메고
6.집에 와서 그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 나의 잃은 양을 찾아내었노라 하리라”

「あなたがたのうちのだれかが羊を百匹持っていて、そのうちの一匹をなくしたら、その人は九十九匹を野に残して、いなくなった一匹 を見つけるまで捜し歩かないでしょうか。
見つけたら、喜んで羊を肩に担ぎ、
家に戻って、友だちや近所の人たちを呼び集め、『一緒に喜んでください。いなくなった羊を見つけましたから』と言うでしょう。

이 말씀은 상식을 벗어난 말씀입니다. 양 백마리 중에서 한 마리를 잃어버렸어요. 그러면 나머지 아흔아홉 마리 만이라도 지켜야 하지 않겠습니까. 여러분, 왜 아흔아홉 마리는 멀쩡한데 한 마리는 길을 잃었을까요. 이건 어렵지 않습니다. 아흔아홉 마리는 영리했습니다. 길을 잃지 않는 방법을 알았습니다. 목자들의 말에 순종했습니다.

하지만 길을 잃은 양은 어땠을까요. 어쩌면 좀 모자랐을 지도 모릅니다. 걸음이 늘였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순종하기를 싫어하고 반항하려고 했을 지도 모릅니다. 그러면 영리하고 순종하는 아흔아홉 마리 양과, 좀 모자라고 반항하는 한 마리 양, 어느 쪽이 귀합니까. 예, 당연히 못난 한 마리보다 잘난 아흔아홉 마리가 더 귀합니다. 그런데 어떻게 했다고 성경은 기록합니까. 잃어버린 한 마리를 포기했대요? 아니면 잃어버린 한 마리를 찾기는 찾아야 하는데, 아흔아홉 마리를 일단 집에 데려다 놓고 난 다음에 나머지 한 마리를 찾아 나섰대요?


아닙니다. 아흔아홉 마리를 들에 그냥 둔 채로 나머지 한 마리를 찾아 나섰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예, 그렇습니다. 너무나도 다급했습니다. 시간이 없었습니다. 조금이라도 늦으면 절벽 아래로 떨어지거나 짐승들한테 먹힐 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이 목자는 모든 것을 버려두고 나머지 한 마리를 찾아 나섰던 것입니다. 그리고는 이제 더 이상 길을 잃지 않도록 아예 어깨에 짊어지고 왔다고 말씀하십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자신의 사랑하는 사람한테 급한 일이 생겼습니다. 지금 빨리 가야 합니다. 그런데 차가 없어요. 택시를 잡아 타야 합니다. 그러면 그 때 택시 기본요금이 얼마고 교통비가 얼마고…… 그거 계산하고 계시겠습니까? 그냥 빨리 있는 돈 모아서 잡아 타야지요.

자신의 사랑하는 사람한테 갑자기 큰 돈이 필요하게 되었어요. 시간이 없어요. 그러면 어떻게 합니까. 집이라도 팔고 땅이라도 팔아야지요. 그 때 시세를 따지고 그럴 새가 어디 있습니까.

하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다른 방법으로 우리를 구원하실 수 있었다면 하나님은 그렇게 하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마음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지금 시간이 없었습니다. 너무나도 다급합니다. 때문에 어떻게 하셨습니까. 하나님께서는 독생자 예수님을 십자가에 달리시게 하신 것입니다.

그 이유는 단 하나입니다. 이렇게 못나고 죄 많은 나 하나 살려보려고 그러신 것입니다.

구약과 신약의 차이가 없어요? 아니요. 차이가 있습니다. 구약과 신약 사이에 있는 종이는 떼어내지 마십시오. 그 종이는 예수님의 피 값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이야말로 인류 최대의 대학살이요, 이는 다름 아닌 나 하나를 살리시기 위한 대학살이었습니다.


이제 예수님의 부활 이후로 학살은 사라졌습니다. 미움은 사랑으로, 정죄는 용서로, 멸망은 구원으로 이어지는 길이 열리게 된 것입니다.

나야말로 미움 받아 마땅하고, 나야 말로 용서 받을 수 없는, 나야 말로 죄로 말미암아 멸망으로 갈 수 밖에 없는, 그런 나를 위해, 이런 못난 나를 위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주셨기 때문인 것입니다.

로마서 8장 32절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

私たちすべてのために、ご自分の御子さえも惜しむことなく死に渡された神が、どうして、御子とともにすべてのものを、私たちに恵 んでくださらないことがあるでしょうか。

이것만으로도 우리는 평생 동안 감사하는 이유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모든 빚을 하나님께서는 독생자 예수님의 목숨으로 인하여 모두 해결해 주신 것입니다. 믿으시면 멘 하시기 바랍니다. 그렇죠. 이 얼마나 감사한 말씀이겠습니까.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아. 이제 나는 구원 받았어. 나는 죄 사함 받았어. 그렇게 기뻐하고 끝인가요?

여러분, 우리는 반드시 알아야 합니다. 구약에서 피 비린 내 나는 학살이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으로 말미암아 막을 내리고 이제 새로운 시대, 미움과 정죄와 멸망이 사라졌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여전히 우리 스스로 학살을 되풀이하고 있습니다.

이는 바로 우리 자신 이야기입니다. 아닌 것 같으신가요?

오늘 말씀을 다시 한 번 보시겠습니다.

마태복음 25장 40절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

すると、王は彼らに答えます。『まことに、あなたがたに言います。あなたがたが、これらのわたしの兄弟たち、それも最も小さい者たちの一人にしたことは、わたしにしたのです。』

그리고 마태복음 18장 6절도 보시겠습니다.

마태복음 18장 6절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작은 자 중 하나를 실족하게 하면 차라리 연자 맷돌이 그 목에 달려서 깊은 바다에 빠뜨려지는 것이 나으니라”

わたしを信じるこの小さい者たちの一人をつまずかせる者は、大きな石臼を首にかけられて、海の深みに沈められるほうがよいのです。

우리보다 잘난 사람, 우리보다 강한 사람한테 우리가 상처를 입힐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상처를 주고 우리가 괴롭힘을 주는 사람들은 모두가 우리보다 약한 사람들, 우리보다 힘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그런 사람들을 실족하게 만드는 일, 그런 사람들에게 아픔을 주는 일은, 그 사람들을 무참하게 살해하는 일이나 마찬가지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에 뭐라고요? 예, 네 주위에 그렇게 힘이 없고 그렇게 약한 사람이 바로 예수님이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얼마나 놀라운 말씀이십니까.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뒤돌아보면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었을까 하는 생각을 하면 참으로 끔찍할 때가 있습니다.

잠시 성경을 살펴보겠습니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은 우리의 방패라고 하십니다.

시편 33:20
“우리 영혼이 여호와를 바람이여 그는 우리의 도움과 방패시로다”

私たちのたましいは主を待ち望む。主は私たちの助け私たちの盾。

시편 115:9
“이스라엘아 여호와를 의지하라 그는 너희의 도움이시요 너희의 방패시로다”

イスラエルよ主に信頼せよ。主こそ助けまた盾。

시편 119:114
“주는 나의 은신처요 방패시라 내가 주의 말씀을 바라나이다”

あなたは私の隠れ場私の盾。私はあなたのみことばを待ち望みます。

여러분, 방패라고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내가 맞을 칼을 대신 맞아 주시고, 내가 맞을 총을 대신 맞아 주심으로 인하여 나를 보호하는 것, 그것이 방패 아니겠습니까.


이사야 53장 5절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しかし、彼は私たちの背きのために刺され、私たちの咎のために砕かれたのだ。彼への懲らしめが私たちに平安をもたらし、その打ち傷のゆえに、私たちは癒やされた。

맞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대신해서 채찍에 맞으셨고, 우리를 대신해서 징계를 받으셨습니다. 진정으로 우리의 방패 되신 분이십니다. 하지만, 과연 우리는 기뻐하기만 하며 되는 것일까요?

우리가 채찍으로 때린 적은 없나요? 우리가 다른 사람을 아프게 한 적은 없나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어쩌면 지금까지도 우리 이웃을 향해 셀 수 없이 많은 공격을 해왔는지도 모릅니다.

주님은 우리를 위한 방패이기도 하지만 우리 이웃을 위한 방패이기도 하십니다.

문득 이런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우리가 천국에 가서 예수님을 만났을 때, 예수님 얼굴이 여기 저기 피 멍이 들고 상처가 나 있어요. 아니, 주님 왜 이렇게 상처가 많이 나셨습니까.

그러자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네가 맞을 돌멩이나 칼이나 총알로부터 너를 지키기 위해서 내가 대신 맞았기 때문이다. 내가 너의 방패가 되어서 네가 맞을 돌멩이를 내가 먼저 맞고, 네가 맞을 칼이나 총알을 내가 먼저 맞았기 때문이란다.

그런데 예수님이 돌아서자 예수님 등뒤에도 수없이 많은 상처가 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 왜 예수님은 등 뒤에까지 이렇게 상처가 많이 나 있습니까.

그러자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네가 던진 돌멩이나 칼이나 총알로부터 네 이웃을 지키기 위해서 내가 대신 맞았기 때문이다. 내가 네 이웃의 방패가 되어서 네가 던진 돌멩이를 내가 먼저 맞고, 네가 공격한 칼이나 총알을 내가 먼저 맞았기 때문이란다.

만약에 예수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시면 어쩌시겠습니까.

우리는 이제 학살을 종식 시켜야 합니다. 우리 힘으로가 아닙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 모든 미움과 정죄라는 공격의 무기를 내려놓아야 합니다. 그래야만 진정한 주님의 사랑을 전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지금 일본은 이제 연호가 바뀐다고 합니다. 2019년 4월로 헤이세이가 끝나고 다음 달부터는 레이와가 시작 된다고 해서 새시대가 열린다고 사람들은 말합니다. 하지만 연호가 바뀐다는 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그게 우리의 인생에 있어서 무엇이 중요합니까.

우리 자신에게 있어서는 무엇보다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새로운 시대가 열려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언제 열려야 하는 것입니까. 그렇습니다. 바로 당장 지금부터 열려야 하는 것입니다. 미움이 아닌 사랑으로, 정죄가 아닌 용서로 말미암아 열려야 하는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2장 24절~25절
24.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
25.너희가 전에는 양과 같이 길을 잃었더니 이제는 너희 영혼의 목자와 감독 되신 이에게 돌아왔느니라

キリストは自ら十字架の上で、私たちの罪をその身に負われた。それは、私たちが罪を離れ、義のために生きるため。その打ち傷のゆえに、あなたがたは癒やされた。
あなたがたは羊のようにさまよっていた。しかし今や、自分のたましいの牧者であり監督者である方のもとに帰った。

우리 모두 우리를 살리신 예수님의 십자가를 깨닫고, 길 잃은 우리를 찾아와 주신 예수님께 감사 드림으로 말미암아, 바로 이 순간부터 새로운 시대를 열고. 우리 이웃에게 예수님의 사랑, 예수님께서 십자가로 보여주신 사랑을 널리 전하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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